이곳은 제 “서재”의 글쓰기 공간입니다. 서재라는 말이 주는 느낌처럼, 여기에는 정돈된 정보만큼이나 머물러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홈페이지에 설교 동영상, 제가 쓴 저서, 제가 촬영하는 사진들을 함께 모아둡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사이사이에, 때로는 짧고 때로는 긴 글로 신앙과 영성, 하나님 안에서의 삶을 기록하려 합니다.
샤워 커튼을 걷어젖힌 촌놈의 승리(?)
1977년, 난생처음 미국 출장. 내 나이 스물일곱.
시카고 맥코믹 플레이스에서 열리는 CES에 참가하러 왔다. 시카고 주재 대한무역진흥공사에서 호텔을 잡아줬는데, “유서 깊고 아주 유명한 호텔”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이미 그림을 그렸다. 번쩍번쩍한 로비, 무게감 있는 콘크리트, 뭔가… “돈 냄새.”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첫 충격.
목조건물. 복도는 삐거덕삐거덕.
나는 속으로 단정했다.
“아… 유서 깊다는 말은… 오래됐다는 말이구나.”
(유서 깊음 = 낡음. 내 마음속 사전은 간단했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두 번째 충격을 받았다.
바닥에 카펫이 깔려 있었다. 화장실에 카펫이라니.
나는 카펫을 보고 잠깐 멈췄다가, 눈을 또 크게 떴다. 변기와 욕실 사이에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 순간, 내 안의 ‘추리 작가’가 깨어났다.
“이 사람들 참… 별나다.”
“부부가 호텔에 묵으면… 샤워하는 거… 서로 보기 민망해서 커튼 치나?”
(지금 생각하면, 내가 뭘 얼마나 대단한 걸 본다고.)
한국에서는 그때 아파트가 막 보급되기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우리 집도 아직 수세식이 아니었다. 욕실은 있었지만 화장실과 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러니 낯설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낯설면 물어보는 게 아니라, 나는 “판결”을 먼저 내렸다는 거다.
“이상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판결은 곧바로 실천으로 이어졌다.
나는 내 방식대로 샤워했다.
커튼? 안 친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는데 왜 치나.
샤워는 물을 끼얹어가며 해야 시원하다. 그러니까… 끼얹는다. 아주 시원하게.
바닥? 젖는다. 카펫? 젖는다.
나는 샤워하면서 속으로 또 혼잣말을 했다.
“봐라. 내가 말했지? 화장실에 카펫은 말이 안 돼.”
(문제는 카펫이 아니라 내가 ‘물’을 전쟁처럼 쓴 것이었다.)
며칠을 그렇게 묵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체크아웃을 하려는데 프런트에서 종이 한 장이 슥 나왔다.
카펫 수리비 청구서.
그 종이를 보는 순간, 내 안에서 ‘정의’가 불타올랐다.
정확히는 “무지의 정의”가.
“아니, 그까짓 거 떼어다가 햇빛에 말리면 되지!”
“뭔 놈의 수리비냐!”
나는 대판 싸웠다. 정말 대판이었다. 그리고 결국 돈을 안 내고 나왔다.
그때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미국이라고 다 맞는 건 아니지. 내가 이겼다.”
나는 승리감까지 느꼈다.
내가 호텔을 이긴 줄 알았다. 내가 미국 문화를 이긴 줄도 알았다.
세월이 흘러서야 알았다.
샤워 커튼은 ‘부부가 민망해서’가 아니라, 젖는 구역과 마르는 구역을 나누는 최소한의 장치였다.
카펫은 물을 들이붓는 걸 전제로 깐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 청구서는 “사기”가 아니라 “정상적인 결과”였다.
그제야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싸운 건 호텔이 아니었다.
내가 지킨 건 정의가 아니었다.
내가 끝까지 붙든 건 “내 기준”이었다.
우리는 결국 자기가 아는 한계 안에서 산다. 그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한계를 인정하기 전에, 그걸 기준으로 세상을 재판한다.
“이상하다.”
“틀렸다.”
“저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들이네.”
나중에 영적으로 성숙해지면서 더 분명해졌다.
이건 단지 촌스러움이나 문화충격의 문제가 아니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의 기본, 곧 하나님 자리를 넘보는 마음과 이어져 있었다.
하나님은 판단의 주인이시다.
그런데 나는 스물일곱의 얕은 경험을 법으로 만들고, 내가 판사처럼 앉아 세상에 판결을 내렸다.
샤워 커튼 하나를 걷어젖힌 게 아니라, 사실은 겸손을 걷어젖혔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 그 장면이 떠오르면 웃음이 나다가도, 바로 얼굴이 달아오른다.
그때 “이겼던” 나는 사실 진 사람이었다.
다만 하나님은 그 진 사람을 오래 참고 기다려 주셨다.
그게 내가 뒤늦게 배운, 가장 깊은 ‘문화’다.
예수신앙은 우리를 ‘변화’로 부릅니다
신앙을 오래 이야기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나는 정말 변하고 있는가?”
지식은 늘고, 말은 익숙해지고, 교회 생활도 자리 잡았는데, 정작 삶의 결은 그대로인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저는 다시 가장 단순한 자리로 돌아가 보게 됩니다.
예수신앙의 핵심 과제는 ‘변화’입니다.
어떤 분들은 “입으로 믿으면 구원”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믿음의 고백이 중요하다는 뜻 자체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 문장이 사람을 살리는 말이 되려면, 한 가지가 함께 따라와야 합니다. 삶이 움직이는가입니다. 고백이 입술에서 시작해 삶의 방향을 바꾸지 못한다면, 그 고백은 너무 쉽게 나를 안심시키는 말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 안심이 오히려 변화의 길을 막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변화를 미루게 하는 덫”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예수믿음”이라는 말은 단지 어떤 교리에 동의한다는 뜻만 담고 있지 않습니다. 한글성경의 번역이 '믿음'을 너무 가볍게 다룸으로 매우 심각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예수 믿음'은 영어로 Beleive Jesus라고 쓰지 않습니다. 영문 성경을 펼쳐 보면 Beleive in Jesus입니다. 전치사 'in'에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큰, 어마무지한 구원의 비밀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믿음'은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고, 배우는 것이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믿음은 그 안에 이미 “변화를 위한 행동”이 전제된 단어입니다. 믿는다는 말은 곧,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결단이 포함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부분이 빠짐으로써 아무리 교회 오래 다녀도 변화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내려와야 할 자리
그 변화의 가장 높은 목표는 무엇일까요?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죄에서 내려오는 것.
우리는 누구나 자기 기준으로 세상을 봅니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사람의 말과 태도, 사건의 결과까지, 모든 것을 자신 기준으로 판단하고 정죄하기 쉽습니다. 나도 모르게 마음속 법정을 열고, 내가 판사가 되어 결론을 내려버립니다.
“저건 틀렸어.”
“저 사람은 왜 저래.”
“저렇게 하면 안 되지.”
“나는 맞고, 너는 틀려.”
이 습관이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성경을 깊이 알아갈수록 더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의 핵심은 결국 하나님 자리를 찬탈한 마음입니다. 내가 중심에 앉고, 내가 옳음의 기준이 되고, 내가 판결권을 쥔 상태. 그 것이 낙원에서 인간을 밀어낸 죄의 뿌리였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데, 하나님처럼 삽니다.
하나님이 아닌데, 하나님처럼 판단하고 단정합니다.
그 마음이 관계를 깨고, 공동체를 흔들고, 결국 내 영혼을 메마르게 합니다.
‘하나님 자리에서 내려오기’는 생각보다 작게 시작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자리에서 내려오는 일은, 생각보다 거창한 업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작은 연습에서 시작됩니다. 하루에 한 번, 아니 한 문장 안에서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방법은 단순합니다.
생각 하나, 말 한마디마다 ‘내 판단’을 내려놓는 연습입니다.
누군가를 보고 즉시 결론을 내리고 싶을 때, 잠깐 멈추기
“내가 다 아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기
상대를 단정하기 전에, 이해하려는 질문을 한 번 더 던지기
판단을 내리기보다, 하나님께 맡기는 쪽을 선택하기
내가 옳아지는 것보다, 관계와 사랑이 살아나게 하는 말을 선택하기
이건 패배가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의 용기입니다.
내가 옳다는 판단을 내려놓는 용기, 내가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용기, 그리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는 용기입니다. 이 작은 용기가 쌓이면, 어느 날 문득 스스로 놀랄 만큼 사람이 달라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말이 달라지고, 표정이 달라지고, 관계의 공기가 달라집니다.
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변해야 합니다.
원래 창조되었던 당시의 품성으로, 성경이 말하는 그 자리까지. 성경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착하게 살자’는 도덕이 아니라, 하나님 형상을 닮아가는 회복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길을 “혼자만의 결심”으로 두고 싶지 않습니다.
함께 연습하고, 함께 나누고, 서로의 작은 변화들을 격려하고 싶습니다.
책 소개와 함께,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제가 이 ‘판단 내려놓기’의 연습을 더 구체적으로 정리해서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당신도 하나님이 아니잖아요』입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주식회사 부크크에서 출판되어 대형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고, 미국과 일본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는 각 국가의 아마존을 통해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책 소개가 이 글의 목적은 아닙니다.
제가 진짜 바라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 책을 읽고 “변화하기로 결정한 분들”과 연결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 주는 분들과 만나고 싶습니다.
“연습해 보니까, 정말 조금씩 달라지더라.”
“말이 먼저 바뀌고, 마음이 따라오더라.”
“정죄가 줄어드니까 관계가 살아나더라.”
“내가 하나님 자리에서 내려오니, 오히려 삶이 가벼워지더라.”
그래서 온라인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특히 남부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작은 모임도 구상하고 있습니다. 거창한 프로그램보다, 실제 삶에서 부딪히며 연습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자리. 서로를 재판하지 않고, 서로를 돕는 자리. 그런 자리를 꿈꿉니다.
게스트북에 당신의 한 줄을 남겨 주세요
이 글을 읽고 마음에 남는 문장이 있었다면, 또는 질문이 생겼다면, 혹은 “나도 바뀌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면, 홈페이지 게스트북에 한 줄만 남겨 주세요.
지금 내가 가장 내려놓기 어려운 판단은 무엇인지
최근에 내가 누군가를 정죄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혹은 반대로, 판단을 내려놓았더니 달라졌던 작은 경험이 있었는지
책을 읽고 있다면, 어떤 대목에서 멈춰 서게 되었는지
짧아도 괜찮습니다. 한 문장이어도 충분합니다.
저는 그 한 줄을 “대화의 시작”으로 소중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우리는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오늘, 내 판단을 한 번 내려놓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당신도 하나님이 아닙니다.
저도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날, 신앙은 더 깊어지고 삶은 더 자유로워집니다.
예전에 방 하나를 세놓았던 적이 있습니다. 저와 나이가 비슷한 이씨 성을 가진 한국 남자분이셨습니다. 그분은 교회에 다니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낮에 집에서 마주치면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곤 했습니다. 사람 사는 이야기 사이로 신앙 이야기까지 자연스럽게 섞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분이 교회를 떠나기로 결정하신 이유를 말씀하셨을 때 저는 오래 멈춰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 아내가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며 감탄하는 말을 했을 때, 20여 년 전 그분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그분의 질문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해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면서요. 그런데 구약을 보면 하나님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시더라고요. 사랑의 하나님이 어찌 그리 잔인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셨거나 교회가 거짓말을 하거나 둘 중 하나 아닙니까.”
그때의 저는 성경 지식도 신앙의 깊이도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을 설득해 드리지 못했던 것이 지금도 아쉽습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며 분명히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 질문은 단순한 트집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인간이 듣기 좋은 하나님만 만들어 내고 있지는 않은지 정면으로 묻는 질문이었다는 점입니다.
먼저 출발점을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을 원래부터 하나님과 좋은 관계였던 존재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대등해지려는 탐욕에 눈이 멀어 선악과를 취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순종의 자리에 머물기를 거부했고, 하나님 자리를 탐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중립이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을 사실상 하나님의 원수로 봅니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사탄이 통치하는 세상으로 추방된 존재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전제가 빠지면, 구약의 심판은 언제나 잔인으로만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전제가 살아 있으면, 심판은 갑자기 튀어나온 폭력이 아니라 거룩과 반역이 충돌할 때 드러나는 결과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죄를 가볍게 만들면 심판은 잔인해 보이고, 하나님을 인간 감정의 기준으로 재단하면 성경은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눈을 뜨고 성경을 정독하고, 귀를 열고 설교를 경청하면 시험에 들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아무 문제 없이 오래 교회를 다닌다는 말은, 어쩌면 생각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방증일 수도 있습니다. 생각 없이 읽고, 생각 없이 듣는 신앙은 시험을 만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얌전한 책이 아닙니다.
이제 요한복음 3장 16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사랑받는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여기서 ‘사랑하사’는 헬라어로 ἀγαπάω(agapaō)입니다. 저는 이 단어를 감상적인 문장으로 읽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읽고 싶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시는 마음이 애틋하신 하나님이, 멸망 쪽으로 기울어져 가는 세상을 보고 그냥 두지 않으시고 움직이신 것이 요 3:16의 ἀγαπάω, 곧 ‘사랑하셨다’입니다. 이 사랑은 단순한 호감이나 감상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의 형태로 나타나는 구원 행동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더 중요합니다. “믿는 자마다”에서 ‘믿다’는 단순 동의가 아닙니다. 요한복음이 자주 쓰는 표현은 πιστεύω에 εἰς가 붙는 구조입니다. εἰς(eis)는 안으로, 속으로라는 방향을 가진 말입니다. 그러니 “believe in Jesus”는 예수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갖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분명히 말씀드리면, 물리적 존재인 사람 예수를 믿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가 실존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인간 예수에 호감을 갖는 것, 종교적 감동을 느끼는 것, 이런 것들은 가능하지만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으로 믿어 들어가며 그분께 자신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과 길과 통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에는 처음부터 준행이 포함됩니다. 의탁은 방향 전환을 낳고, 방향 전환은 순종을 낳습니다. 말로는 주님이라 부르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구호에 가깝습니다. 믿음은 결국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따르고, 지키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은 달콤한 위로만이 아니라 선언입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께 대등해지려다 추방된 존재이며, 하나님과 원수 된 자리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원수를, 멸망을 향해 기울어진 자를,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셨습니다. 움직이셨습니다.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를 부르십니다. 믿어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예수 안으로 들어와 그분의 가르침을 준행하라고 하십니다.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 3:16의 사랑과 믿음을 여전히 듣기 좋은 단어로만 붙들고 계십니까. 아니면 원수였던 저희를 위해 하나님께서 먼저 움직이신 사건으로 붙들고, 그 예수 안으로 들어가 그분의 길을 따르는 삶으로 붙들고 계십니까.